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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생활수기 - 우리 마음 속의 장애
양덕여중 3-5 박 소 영중학교 1학년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애인 복지관이라는 곳을 갔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러서 마치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으로 길을 나섰다.건물에 들어서자 원장님께서 반가이 맞아 주셨다.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둘러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아이들의 괴이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만의 의사소통을 하는 모양이었다.“야, 무섭다. 우리 그냥 가자.”“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 같은 인간인데 잡아 먹기야 하겠니? ”“그래도 왠지 으슥한게 좀 무섭다” 정말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과 호기심, 흥미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그 때는 처음 가본 곳이라 그럴만도 했다.대충 마음을 정리하고 우린 청소를 했다. 장애인 아이들의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킥킥대던 친구 그 아이들이 오가는 곳을 피해가며 청소하던 친구. 우리는 그들을 정상인 인 우리와 멀찍이 떨어뜨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청소가 끝나고 원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이들과 놀아 주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서로 먼저 가라고 등을 떠밀다가 결국은 슬그머니 들어가 아이들과 떨어진 곳에 앉았다. 어쩌다가 한 아이가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린 소리치며 도망을 갔다. 그 때 난 한가지 그림같은 모습을 보았다. 그 곳의 직원이 한 아이의 옷을 갈아 입혀주며 안아주고 장난을 걸고 볼에 입을 맞추고 하는 하나의 그림같은 모습을 말이다. 그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워 보이던지 우린 그 때서야 철없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린 그 아이들의 등에 끼어 앉았다. 정말 여러가지 모습들 이었다.TV에서만 봐 오던 바로 그 아이들 소아마비로 손과 발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누워만 있던 정석이, 간질로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져 이마가 온통 멍투성이던 재원이 무슨 병인지 걷지를 못해 무릎을 끓고 앉아 팔로 움직여 다니던 민석이 만화책에 있는 글을 옮겨 적으며 자랑을 했었다.그 아이들의 웃음에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웃음은 감히 내 입에 올릴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순수’라는 것이 배어 있었고 깨끗했다 이렇게 느끼고 감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점심때가 되었다.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 줘야 했다.내가 먹여줘야 할 사람은 맹인이었다. 시력이 나빠 앞이 안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알 자체가 없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입에 가져다 대면 그 느낌으로 입을열었다.“맛있어요?”내 물음에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내가 먹인 아이는 재원이라는 꼬마아이였다. 무릎에 앉혀서 먹여주었다. 속눈썹이 길고 눈도 참 이뻤다. 그 아이의 침대에는 이렇게 적힌 푯말이 있었다. 성명 - 최재원, 나이- 7∼10 발견장소 - 명장동 놀이터 이렇게 귀엽고 이쁜 아이를 버린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지, 얼마나 잘난 사람이기에 부모로서의 책임도 다 하지 않은 체 이 아이를 버린 것인지 우린 경계심, 두려움, 동정심 같은 것들로 우리와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던 그들을 어느새 ‘사랑’이라는 공동체로 묶어 놓았다.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 정석이, 우린 누워있는 정식이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정석이에게 장난삼아“나 이쁘지?” 라고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석이는 겨우 혀를 돌려 “응” 이라고 답했다. 우린 모두 웃었고 정석이는 우리가 웃는게 좋은지 무슨 물음이든 ‘응’ 이라고 답했다. 정석이 그 아인 아름다운 아이다. 혼자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난 분명 장담한다. 그 아이는 아름다운 아이다.그 아이들의 장애를 이유삼아 부모로서의 책임을 회피한 그 어른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모습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기 전에 자신을 한번 보라고 자신의 마음의 장애를 뉘우치라고 말이다.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마음의 장애를 앓고 있다. 그러면서도 뉘우치지 못하는 우리 그것은 그 아름다운 아이들에 비해 너무도 흉한 모습이다.우리는 돌아 올 시간이 되어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어떤 아이는 옷을 잡으며 못가게 했고 어떤 아이는“또 가?” 하며 토라졌다.“또 올께” 하며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을 하며 헤어졌다.그곳을 다녀온 뒤 내게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아마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길거리에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과 마주치면 예전과 달리 쳐다보지 않고 못본척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지나치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찮은 동정심이 가득한 눈길 그런게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같이 대해 달라는 것이다.방학이 되면 또 가볼 생각이다. 달려드는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꼬옥 껴안아 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1997.08.25
조회수 : 1052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와서
화명중학교 2-6 조 아 라문화유적답사를 하기위해 북구청에 모였다. 버스를 탈때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여수였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크게 활약하셨던 곳으로 알고 있다. 전라 ‘좌수영’이란 말을 처음 들었는데 ‘해군’이라는 뜻이었다. 여수는 바다가 있기 때문에 안개가 끼어 날씨가 좋지 않았다. 여수에서 유명한 곳은 오동도와 돌산대교, 내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오동도는 작은 섬으로, 크기는 약 3만 6천여평, 700미터의 방파제로 4차선 도로가 나 있다고 했다. 오동도의 동백나무는 4-5월에 꽃이 피고 해장죽은 바다에서 나는 대나무라고 했다. 오동도 우측으로는 돌산도가 누워 있었다. 이곳은 밀물과 일출이 아주 멋있다고 해 한번 보고 싶었다. 다음은 돌산 연육교로 갔다. 연육교는 4년 만에 준공 되고 공사비는 180억, 대단한 액수였다. 향일암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거세게 불어 향일암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정경으로 보이는 바다는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낙안 민속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로 들어서자 시골 냄새가 물씬 났다. 꽃, 나무가 많아 공기는 아주 맑았다. 짚과 흙으로 만든 집들을 보니 더위가 가시는 듯 시원했다. 그 집에는 사람들이 사는 것 같았다. 낙안 민속 마을에는 자그마한 박물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들어설 때 바로 보이는 것은 조상께 제사를 모시는 장면을 인형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실물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또, 봄, 여름, 가을, 계절별로 그 계절에 나는 음식을 장만해 상을 차려 놓은 것도 있었고, 설날, 정월 보름 같은 명절에는 또다르게 상을 차렸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보는 것 같았다. 옛날 낙안 민속마을의 정경을 본 떠 만든 인형집들도 있었는데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에 썼던 생활용품들도 있었다. 벽에 진열된 낙안 민속 마을을 그린 그림도 구경했다. 낙안 민속 마을을 빠져나와 선암사로 가기 전에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내일 볼 거제 해금강 한려수도와 한산도를 생각하며 푹 쉬기로 했다.
1997.08.25
조회수 : 933
시 - 운동장
만덕초등교 4-6 백 연 주 싹 싹모래성을 한층씩을쌓아 보고운동장한 바퀴뛰어 보면헉헉숨이 차지만넓은 운동장처럼내 마음도넓어지네.
1997.08.25
조회수 : 988
재활용 되지 않는 물건 생산되지 말아야
화명벽산Apt 박 명 선먼저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쓰레기를 담당하시느라 수고하시는 청소과 직원여러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 아파트가 쓰레기 줄이기 시범 아파트로 지정되면서 단지 내가 얼마나 말끔해졌는지 방문하는 사람마다 첫마디가 “어머나, 여기는 쓰레기를 상전 모시듯 하네.”입니다. 왜냐구요?지금 여느 아파트 할 것 없이 대체로 잘 실천되고 있는 분리수거를 저희들 역시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잘 하고 있음은 물론 퇴비로 쓰이고 있는 음식물 쓰레기 발효 역시 전 주민이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여름철 골칫덩어리 수박이 음식물 쓰레기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수박 씨에서 나온 싹이 논과 밭으로 올라와 다른 작물을 못자라게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아파트에서는 수박 껍질을 잘게 썰어 소쿠리에 펴 베란다에 내놓고 꼬실꼬실할 때까지 말린 다음 생활쓰레기로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마철엔 수박껍질이 잘마르지 않을 뿐더러 썩기 쉬워 얼마나 여러번의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야말로 ‘상전 모시기’, ‘수박과의 전쟁’이었습니다.직장인 주부들은 식사준비 하기에 바쁜데 쓰레기까지 함부로 버릴 수 없으니 여간 힘드는 게 아닐 테지요. 하지만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함께 실천해야만 우리 사회가 쓰레기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깨끗한 환경만들기에 우리 주민 한사람 한사람의 협조가 없었다면 이렇게 깨끗한 아파트 단지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또다른 누가 함께 하는 마음이 없으면 제 효과를 거둘 수 없는게 쓰레기 문제입니다. 그리고 재활용 분리를 하다보면 아무리 주민들이 나선다해도 재활용 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스치로폴이나 마요네즈병, 케찹병 등은 공장에서부터 생산되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모두가 솔선수범하여 보내는 여름을 쓰레기 조각 하나, 찌꺼기 하나라도 소홀히 버리는 일 없이 깨끗하게 보낼 수 있길 당부합니다.
1997.08.25
조회수 : 1172
북구출토유물 상설 전시
… 구청 본관 2층 상설 전시대 마련 …북구청은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지난달 21일부터 북구 출토 유물 사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이번 전시회는 부산시립박물관등에 전시되어 있는 우리구 출토 유물을 사진으로 촬영해 전시함으로써 구청을 방문하는 구민들에게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시키기는 한편 향토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구청 본관 2층에 전시대를 마련, 상설 전시된다.현재 전시사진은 금곡율리패총, 만덕사지, 화명동고분군, 덕천동 고분군 발굴 유물사진 등 총 50점인데 일정한 전시 기간이 지나면 북구 문화재 사진과 옛날 북구 모습 등을 담은 사진으로 교체해 계속 전시할 계획이다.
1997.08.25
조회수 : 1106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17 - 덕천동 의성, 기찰
덕천동 의성(義城)과 기찰(譏察)의 유적백 이 성 (낙동향토문화원장)덕천(德川)이란 지명(地名)은 원래 만덕(萬德)쪽에서 흘러 내리는 하천(河川)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상학산(上鶴山)의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들을 받아 안고 서쪽 강변쪽으로 벋어내린 산 줄기를 끼고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 바로 덕천(德川)인 것이다.이 하천의 하류를 끼고 남쪽 높은 지대에 남산정(南山亭) 숙등(淑嶝) 마을이 있고 하구에 이르면 북쪽으로 옛 성터인 의성산, 의성대(義城臺)가 올려다 보인다. 성터의 동쪽 연둥개 갯가의 구법곡(仇法谷) 입구에 조선시대 관서였던 기찰(譏察)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의성산의 동북쪽 구릉지대가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初期)의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되었던 대장골(大莊谷)입구이다. 이곳 고분이 있었던 곳의 뒷산 능선에서 빗살 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우리고장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조선시대 구법곡에 기찰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의성 옛 성터에 왜군이 주둔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는 이곳의 지명은 공식적으로 양산군 좌이면 산양리(梁山郡 左耳面 山陽里)로 나와 있다.그 당시 좌이면(左耳面)에는 현재의 금곡동에 공창(公昌) 동원(東院), 화명동 쪽에 대천(大川) 와석(臥石) 수정(水亭), 용당(龍塘) 덕천동 쪽에 산양(山陽') 구포대리쪽이 시량(師良) 강변쪽으로 남창(南倉), 그리고 그 아래 삼락동쪽의 섬이었던 유도(柳島)와 강 건너 소요도(所要島)가 소속되어 있었다. 산양(山陽)마을인 이곳 일대의 지명은 현재 의성 마을과 기찰마을로 남아 있다.의성마을의 유래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왜성(倭城)을 쌓아 주둔 했던 곳으로 넓이 1800평의 성터에는 아직도 성벽이 남아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감동포성(甘同浦城)으로 나와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가야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한다.전설에 의하면 이곳 성을 지키던 신라의 황룡장군과 500명의 군사들이 왜구의 침략을 맞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의(義)로운 죽음을 상징하여 의성(義城)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의성마을은 성터의 강변쪽에 있던 마을을 바깥의성이라하고 성터 서편을 끼고 있는 안쪽마을은 안의성이라고 했다.바깥의성은 경부선 철도를 놓기전에는 배를 대던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곳 나룻가 물속에는 농처럼 네모 난 농바위가 있었다. 그리고 구포에서 덕천내를 지나 바깥의성에서 안의성으로 성을 끼고 넘어가는 고개가 의성고개이고 화명동 수정마을에서 넘어 오던 고개는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고개라고 불렀다.밤나무고개는 옛날 구포장에서 소를 팔고 가다가 도둑들에게 돈을 털렸던 외진 곳으로 소문이 났던 고개이다.구법진 기찰의 내력조선시대 구포 남창(南倉)이 있던 감동진(甘同津) 나루에는 세곡(稅穀)을 조운(漕運)하던 배가 드나들었고 금곡 동원진(東院津) 나루에는 일본인들이 교역(交易)하던 배가 오르내렸는데 이곳 일대에서 밀무역과 잠상(潛商)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구법곡 입구에 수검소(搜檢所)인 기찰(譏察)을 두고 찰방(察訪) 근무했다고 한다.그래서 이곳을 구법진(仇法津) 나루라고 불렀다.그리고 기찰이 있었던 이곳의 의성 작은산 암벽 앞쪽에 있는 은호아파트의 신축대지 공사중에 삼국시대의 토기 7점이 발굴되어 이곳이 역사적 내력이 있는 지역임을 증명해 주었다. 기찰에서 의성 성터의 동쪽으로 올라가면 현재 낙동고등학교아 덕천여중이 있는 산봉우리 끝머리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을 가는골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화장막이 있었고 이곳에 상여를 메고 가는 곳으로 가는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구법곡에는 일제시대 군 보급기지창이 들어서서 낙동고등학교자리에 피복창과 곡물창이 있었고 탄약을 저장했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새로이 등장한 지명 ‘덕천로타리’이 고장 교통의 중심지인 덕천로타리!덕천로타리 일대를 살펴보면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도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만 하더라도 만덕 쪽으로 가는 소로(小路)가 있었는데 1963년에 동래쪽으로 가는 차도(車道)를 개설하였고, 덕천냇물을 건너는 다리와 양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있었을 뿐이다.그 이후 1973년에 들어와서 남해안 고속도로를 내면서 의성 성터인 큰산과 그 아래로 벋어내린 작은 산 허리를 잘라 그 사이에 도로를 닦고 강건너 대저 출두리와 연결하는 낙동강 다리를 개통하면서 서부 경남을 잇는 인터체인지가 가설되었다. 뒤이어 70년대 말 덕천하류지역 일대 30만평을 아파트 단지로 고시하면서 옛날의 야산과 논바닥들이 모두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었고 덕천 개울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대형배수로를 내어 흐르게 하고 로타리에서 구포역까지 고가도로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구포시장 입구가 되어 장날이 되면 로타리일대 곳곳이 장터가 되었다.그래서 덕천로타리는 4통 8달(四通八達)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된 것이다.육로교통의 중심지인 이곳 덕천로타리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1905년 경부선 철로가 놓여지기 전만하더라도 이곳은 덕천냇물과 구포대리천 냇물이 합쳐지는 하구(河口)지역으로 기찰이 있던 구법진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다.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덕천로타리에서 현재의 광덕물산공장이 서 있는 만덕 입구까지 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그 당시 만덕에는 굉장한 규모의 만덕사 사찰이 있었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로 오고 갔던 고갯길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설인 것이다.옛날의 뱃길이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하구쪽으로 밀려났지만 조선시대 기찰이 있던 구법진까지는 배가 드나들었음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그리고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덕천로타리 일대는 큰 비만 오면 상습 침수지역이었다.왜정시대 논밭이 있었던 이곳 일대에 큰 물이 잠기면 의성고개 쪽에서 구포시장 입구 수문까지 배를 타고 오고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지금은 경부선 철로에서 강쪽으로 대형 배수장을 설치하여 물난리를 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덕천로타리는 옛날 배가 드나들었던 곳임을 생각하면 세월무상을 느끼게 한다.연둥개와‘홍영감 도리 도리’이야기옛날 배가 드나들었던 덕천로타리 일대 지명이 연둥개였다. 구포쪽으로 남창이 있던 언덕과 대리천제방 아래 시장사이의 하천 하구동네를 연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미루어볼 때 연둥개라는 지명은 연꽃과 관련된 갯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연둥개라고 하면 구포시람들은 어린 시절 멱을 감던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옛날 기찰쪽으로 뱃길이었던 곳이 토사가 퇴적되어 논밭으로 변해 버리고 하천 폭은 좁혀졌으나 물길은 제법 깊었다.그래서 구포의 청소년들이 여름철만 되면 연둥개에 와서 멱을 감았다.그리고 심심하면 개울 양 옆에 있는 논둑으로 올라 메뚜기도 잡고 잠자리도 쫓으면서, 미꾸라지도 잡는 등 온갖 장난질을 하다가 물에 풍덩 들어가기도 하면서 여름철을 보냈던 것이다.그러다보니 논엔 심어 놓은 나락이 밟히기도 하는 등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이곳 연둥개 일대의 논 주인은 구포시장에 살던 홍씨였다.나이가 제법 들었던 홍씨는 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또 논 쪽으로 올라와 잡탕질을 하면 이를 쫓아내기 위해 고함을 치면서 달려 오곤했는데 아이들은 벌거벗은채로 도망가면서 ‘홍영감 도리 도리’ 소리를 치면서 어른 약을 올리곤 했다.이 말이 구포에서 유행어가 되어 버렸는데 1950년대에서 60년대초까지 청소년기를 거친 구포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홍영감 도리 도리’ 이야기가 전해온다.
199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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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2주년을 맞으며
“구포장터 3·1운동은 조국광복의 밑거름” 선열들의 항일투쟁 오늘날까지 이어져 북구, 역사의 고장으로 길이 인식될 터올해로 조국광복 52주년을 맞는다. 이날이 오면 조국광복을 위해 3·1독립운동을 일으켰던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우리고장 북구에서도 3월 29일(음력 2월 28일)구포장날을 맞아 구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의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고 또 사회신분으로는 교사, 면서기, 농민, 상인, 노동자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부산동래에서 일어난 의거의 주동체가 주로학생들로서 대부분이 시위운동에 그친데 비하여 굳센 저항을 발휘한 이곳 구포시장 의거는 이채로운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주동인물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군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의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주재소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증원된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 구포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일제에 항거했던 많은 분들은 그후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특히 광복의 그날까지 향토를 지키면서 민족의 얼을 일깨우는데 신명을 바쳤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구포장은 당시 음력 3, 8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정부의 세곡을 보관하던 남창 등 물자의 중요한 집산지이자 감동진나루터를 배경으로 한 교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하였으며, 서쪽으로 철로 건널목을 넘어 구포1파출소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구포장터를 드나드는 나룻배가 정박했던 나루터 자리에는 그 뒤 낙동강 제방이 쌓이고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었으며 지금은 둑길을 따라 사상과 덕천로터리로 이어지는 산업도로와 고가도로가 개설돼 있는 가운데 옛날 남창(南倉) 자리에는 구포맨션이 들어섰고 그 옆에 100년 됨직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외로이서 있다. 또 장이 열렸던 골목들은 그대로있는 편이나 새로운 양옥들이 들어섰고 큰 장이 벌어졌던 넓은 공터에는 구포 1파출소가 위치해 있어 옛날의 장터로서 자취를 찾을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장한 발자취를 남겼던 선열들의 항일 투쟁 정신은 오늘날까지 북구인 모두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우리고장 출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은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구청은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거룩하고 자랑스런 구포장터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둑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또 구포향토회에서는 구포장터 3. 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조국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매년 광복절을 맞아 동대항 친선 축구대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이 대회는 1947년 8월 15일 구포읍체육회(초대회장 박건자 낙동강소주주식회사 사장)가 결성되어 첫 친선대회를 가진데 이어 6·25동란인 1953년 광복절에는 피난해온 사람들이 부산에 집결해 있음으로 해서 전국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열들의 얼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북구는 역사의 고장으로 길이 인식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고장 선배들의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통일국가를 건설해 나가는데 온 힘을 모아 나가는 일이다.◈ 북구 출신 독립 유공 수훈자 ◈◎ 윤정은 (尹正殷) - 구포동 1852. 9. 8 ∼ 1920. 1. 19 ― 건국훈장 애국장(1991년)1919년 3월 29일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년 3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러던중 이듬해 1월 19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 임봉래(林鳳來) - 화명동 1890. 4. 22∼1968. 2. 15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1919년 3월 29일 구포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옥겸 (金玉兼) - 구포동 1892. 3. 19 ∼ 1957. 8. 30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독립선언서와 소형태극기 수백매를 제작, 구포 장날인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출동한 일경에 현장에서 피체되어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허치옥 (許致玉) - 구포동 1894. 10. 27 ∼ 1924. 9. 6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구포장날 독립만세때 1천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하다 일경에 피체,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형기 (金炯璣) - 구포동 1896. 8. 9 ∼ 1950. 8. 20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중 재경유학생회 회장으로 학생대표가 되어 서울 탑동공원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3.1운동을 벌이다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서영석 (徐泳奭) - 금곡동 1925. 11. 24 ∼ 1963. 6. 25 ―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1941년 일본대판에서 조선독립청년당에 가입하여 42년 3월1일을 기하여 조선독립선언 항일학생봉기를 추진하던중 일경에 탐지되어 피체,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김달수 (金達洙) - 구포동 1888. 11. 27 ∼ 1924. 12. 3 ― 건국훈장 애족장(1995년)구포장날 독립만세를 전개하다 함께한 11명의 인사가 일경에 붙잡히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투쟁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 윤장수(尹章守) - 화명동 1895. 1. 6 ∼ 1958. 3. 20 ― 대통령 표창(1995년)구포장날 독립만세때 1천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돌진하다 일경에 피체, 징역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양태용 - 금곡동 1893 2. 24 ∼ 1937. 11. 15. ― 대통령표창(1997) 1919년 3월 30일 부산 동래군 구포시장에서 임봉래, 윤정은등과 같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기까지 미결기간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자료제공 : 부산지방보훈청
199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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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카풀 모범 동 ▶ 만덕2동
“이것이 카풀(CAR POOL)제다”출근시간(07:00∼08:30)마다 하루 150여대 승용차 자율 참여 즉석호의 동승아침 7시 30분, 북구 만덕2동 신만덕 사거리 백양비디오 가게 앞에는 출근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든다. 그 때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서자 기다리고 섰던 두세 사람이 이미 약속된 것처럼 그 차를 타자 승용차는 다시 달린다.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모한 만덕2동. 누군가가 나서있지 않아도 카풀제가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이미 「카풀 모범동」으로 떠올라 있다.현재 관내 아파트 7개소와 도로변 두 곳(신만덕 사거리 외 1)에 카풀 정류소를 설치 해놓고 시범 운동을 계속 벌여오고 있다. 이웃과 인정을 나누기도 하고 지역 교통량을 줄이는데 한 몫을 한다 생각하면 일석이조다. 처음 이 운동을 주민참여로 유도하는데는 만덕2동 직원들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으나 만덕2동 바르게살기위원회,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새마을청년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섬으로 95년 4월부터는 매일 출근시간(오전 7:00-8:30)마다 요일별 교대로 현장 매칭해 하루 평균 120-150여 대의 승용차가 참여하고 있다. 동승하는 사람은 대부분 직장인과 학생들로 카풀운동이 처음 실시되던 당시, 같은 시간대에 만나 늘 같은 동승자를 태우는 것이 아닌 서면·동래 지하철역 등 방향만 같으면 즉석 동승할 수 있는 것이다.이제 우리나라도 차량 1000만대를 넘어섰다. 시 전체의 가장 큰 문제가 교통문제인데 이는 도로 확장 개설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10부제」가 시민자율화로 되면서 거의 이행되지 않자 현재는 「무지개 운동」으로 일원화되어 시민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가운데 만덕2동 이야기는 어느 누가 들어도 부럽고 자랑스런 일이다. 다른 곳에선 잘 되지 않고 있는 카풀 운동이 유독 만덕2동에서 자율실천되고 있는 것은 지역 주민의 ‘이웃 사랑' ‘지역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 유쾌종 씨는 “카풀 차량에 참여하는 사람은 결코 어떤 혜택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카풀 차량에 대해 도시고속도로 통행료가 면제되어 있지만 실제 만덕에서는 도시고속도로와는 연결도로가 없어 거의 혜택이 없는 실정이고, 날로 증가하는 교통량을 줄여 나가려면 카풀·무지개 운동 참여자들에게 정부 시책 차원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 많은 시민이 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앞으로「무지개 운동」추진에 따라 참여자에 대한 불편함이 없도록 현장동승할 수 있게 해 「카풀」은물론 「무지개 운동」까지 활성화시켜 나가는 것이 만덕2동의 야무진 계획이다.
199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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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백산악회 자연정화 활동 벌여
금백산악회(회장 윤종열)는 지난 7일 오후3시 남해고속도로밑과 주변 낙동강변에서 300여명의 산악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낙동강 살리기 자연정화 활동을 폈다. 특히 이번 정화에서 구청으로 부터 청소차량과 청소장비를 지원받아 각종 오물등 쓰레기 70마대를 수거했다.
199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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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3동 - 문화유산 답사 실시
덕천3동 한사랑 서당에서는 지난 7월 25일 회원 및 자녀 30명과 함께 학생들의 학습효과를 높이고 산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김해 김수로왕릉, 상수도 매리취수장, 양수발정소(삼랑진), 천태사(원동)를 둘러보며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참석자들은 우리 고유문화유산을 답사·체험하고, 수자원 및 에너지 절약의 산교육을 실시하는 등 훈장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선물을 증정하기도 했다. 현장 답사·체험은 에너지 절약 및 수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당의 학습 의욕 고취 및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등 회원간 친목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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