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호

이동

시론 / 김도우(2020년 2월호)

  • 2020-03-02 12:30:30
  • 문화체육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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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그리고 지상과 반지하


영화 기생충은 우리의 사회를 지상과 반지하로 나누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최하층민의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집을 두고 공존하고 있다. 말 그대로 환경이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것, 결국 인간이라는 본성에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영화에 나타난다.

반지하는 서민의 상징이면서, 인생의 지하라는 이중적인 해석이 있다. 지금 반지하에 살고 있는 청춘들이 많고 반지하로 몰리고 있는 자영업자와 노인들의 막장이 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적 구도이다. 어떻게 보면 반지하는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자가 이야기하길,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건물이나 집 안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인생의 94%라고 하였다. 그만큼 자연과의 교감을 잃어버린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이나 구석진 곳에서는 활동력이 줄어들어 폐쇄된 생활을 하기 쉽다. 그와 달리 지상이라는 곳은 빛이 닿는 곳, 삶의 생명이 움직이는 곳이며 활발한 소통과 생산의 역동적 장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 생기면 하루빨리 반지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였다.

문인·희망북구 편집위원

우리가 사는 삶은 환경과 규범의 산물이다. 환경이 규범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거꾸로 규범이 환경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외국에도 반지하 형태는 있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진 않는다고 한다. 지상과 반지하의 간극은 하늘과 땅이다. 반지하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에 좌절감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유독 한국이 반지하 형태의 거주공간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직 가난 때문일까. 가난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보다는 남북 대립, 주택 부족이란 환경이, 지하에 주거공간을 허용하는 법규와 지하에 집을 지어 수익을 추구하는 문화가 반지하 주거공간을 만들어냈다. 1980년대 주택 위기가 찾아오면서 정부는 이 공간을 거주 시설로 합법화했다. 반지하가 치솟는 집값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되었다.

지하층규제 완화가 필요한 배경에는 주어진 규제 환경에서 최대한의 수익 추구 메커니즘이 있다. 건축 기술의 발달로 지하공간을 개발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의 삶보단 누군가의 이익이 중요시되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그에 맞는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다. 사회제도가 오히려 부유층에 유리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부는 기업을 상속할 때 공제 등의 혜택을 주는 제도를 상속받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바꾼다고 발표했다. 소득격차에서 오는 철저한 사회계급에 대한 비난과 과연 누가 이 사회에 기생하는 이가 반지하에 사는 서민인가 아니면 기득권인가. 힘겹게 살아가는 민생을 보살펴야할 책임이 있는 정부와 사회적 시스템이 서민들을 반지하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까.

 

전 세계 매스컴들이 한국영화가 보여준 반지하를 조명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외신들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반 지하 주택의 역사적 연원을 따져 들어가는가 하면, 실제로 반지하 주택을 찾아가 거주자들을 인터뷰하는 등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반 지하 공간을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임대하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반지하라고 해서 전부가 곰팡이냄새가 나고 어둡고 습기가 차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를 향해 꿈을 펼쳐나가는 청춘이 있을 것이고 현실을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건강한 생활력이 있는, 어려울 때 가진 추억의 집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먹이사슬의 고리를 빗대어 빈부격차를 고발하는 기생충은 자본주의가 낳은 경제적 원리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로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한국인들은 반지하방이나 다락방, 옥탑방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있다. 그것은 가난을 극복해온 삶의 흔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쓰럽고 슬픈, 우리의 자화상이 영화 속에 투영되어있어 더욱 열광적인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